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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글쓰기

편글 릴레이 소설 중 7편

 

이번에 새로 들어간 글쓰기 스터디에서 릴레이 단편 소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7편을 맡게 되었는데, 앞 내용은 추후에 올려드리고, 이번에는 제가 작성한 부분만 올리겠습니다.

 


by pinterest(수민쌤이 찾아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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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지는 이야기에 우리는 밤이 아닌 서로에게 잠기기 시작했고

이따금 통창을 두드리는 눈바람만이 어둠에 뒤덮인 별장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갑자기 좀 추워진 것 같지 않아?"

양손을 비비는 시늉을 하며 우정이 물었다.

 

재희는 문득 뭔가 눈치챘다는 모양새로 녹이 슬지 않은 구석을 찾기가 힘든 철제 난로 곁으로 다가갔고, 이내 불길한 소식을 전해왔다.

 

"아, 이거 등유가 다 떨어져 버렸잖아. 나도 어릴 때만 와봤던 곳이라 연료 생각은 못했네..."

 

잠시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민하던 재희는 곧 고개를 번쩍 들어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으니 얼른 다녀올게! 시내까지 갔다 오는데 1시간이면 될 것 같으니까, 둘이 잘 있을 수 있지?"

 

우정이랑 둘이...? 당연하지!

아, 아니! 그래도 예의상 물어봐야겠지?

 

"아 그런데 재희는 혼자서 괜찮...!"

재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내 가슴팍을 밀어냈고

그렇기에 말을 다 끝맺음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시원한 마음이 생기는건, 기분탓이었을까?

 

그렇게, 지체할 것도 없다는 듯 재희는 연료를 구하러 출발했고

 

둘이 남은 우정과 내가 마치 약속한 경극 배우처럼 서로를 바라본 순간

 

어쩌면 머리가 눈발처럼 희게 되어서도 잊지 못할,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리, 그럼 수다나 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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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니는 이야기, 어제 시작된 겨울 방학 이야기, 가고 싶은 여행지,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취미에까지.

우리의 이야기샘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우정이에 대해서 알아가는 일이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우정은 조심스럽게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사실은 몸이 조금 안 좋아...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슬픔을 감추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이

오히려 내 심장을 저 담 너머로 떨어뜨리려 했지만

우정이의 용기에 보답하기 위해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정은 숨을 돌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 예중 다니다 전학온 건 얘기했지? 어렸을 때부터 춤 추는 걸 좋아했고, 초등학교에 다니고부터 한국 무용의 매력에 빠져서 매일같이 몸을 움직이고, 연습했어. 춤을 추는 시간은 온전히 나로 있는 시간으로 느껴져서 행복했고, 내 몸짓이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는 일이 즐거웠어.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부터인가 춤을 추는데 가슴이 아프더라? 처음에는 그냥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계속 반복되고 증세가 심해지더라구. 몇 번은 쓰러지기도 했어.

 

몸을 움직여서 마음을 표현하고, 내 존재를 표현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는데... 몸을 움직이면 아프다니... 결국 부모님이 무용을 그만두라고 하셨고, 지금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거야. 사실 나도 누군가가 그만두라고 말해주길 원하고 있었나 봐."

 

나는 뭐라 시답잖은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16살의 나는 놀랍도록 미숙하여 그녀의 깊은 슬픔에 압도될 뿐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으며, 그녀의 힘없이 늘어뜨린 가녀린 손조차도 잡아줄 수 없었다.

 

"애써 뭐라고 할 필요 없어. 그냥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던 거야. 그리고 그게 영수라서 난 힘이 돼."

 

서로의 세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때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정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고 이따금 느껴지는 숨결이 뜨겁게 데워져 있었으며,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생기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우정은 우울한 감정이 많이 가신 듯 했고,

특유의 발랄한 제스쳐와 함께 나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우울한 얘기 그만 하고, 눈도 많이 왔겠다, 기분 전환이나 해 볼까?!"

 

그렇게 난 우정의 손에 이끌려 홀린 듯이 문 밖으로 나갔고

우리는 마치 차가움이라는 속성을 배제한 듯

눈이 그저 새하얀 지점토라도 되는 것처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열심히 꽃잎을 만들던 우정은 짐짓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눈꽃이 만들어 진다. 어때? 예쁘지?"

 

그 물음에 답하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만, 그녀를 너무 똑바로 쳐다봐 버렸고

 

그것이 실수였는지

 

곧, 내 사고회로가 멈춰버렸다.

 

너의 미소가 지난 추석에 봤던 보름달보다도 훨씬 밝아서였을까?

아니면 내 귀를 타고 들어오던 너의 목소리가 미처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 버려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 그날 네가 예쁘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일까?

 

물론, 지금은 안다, 그 전부라는 걸.

 

그래서 대답해버렸다.

내 시야 안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은 오직 너에게만 있다는 듯이,

네가 든 눈꽃이 아닌 너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어, 예쁘다."


너를 처음 본 건 학교 급식실에서였다. 무용을 포기하고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한창 우울했던 때, 웬 남자애가 급식을 먹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은 그랬다. '엉뚱한 아이네'

 

그리고는 신기하게도 하교 버스에서 그 엉뚱한 남자애를 마주쳤고, 또다시 엉뚱한 질문을 받았다. 시래기 된장국이랑 콩나물국 중에 뭘 좋아하냐구? 처음 만난 친구가 한 질문 중에 가장 웃겼던 질문이다. 그래도 얼마 만에 웃었는지 모르겠다. 참 재밌는 아이인 것 같다.

 

다음 날, 추운 날씨에 체육 시간이 끝나고 얼른 교실로 돌아오는데, 어제의 그 엉뚱한 아이를 마주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 예쁘다"

 

다짜고짜 나를 빤히 보며 예쁘다고 하더니, 곧 영어단어를 외우는 척을 하며 우당탕 도망갔었지.

'뜬금 없이 뷰티풀을 외우는 중3이 어딨냐구...'

그래도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꽤 부끄러워서, 모르는 체하며 얼른 그 아이를 보내버렸다.

내 핑크색 물건들 사이에 수줍게 놓인 회색빛 포카리스웨트는 깨나 달콤했고, 따뜻했다.

 

그때 이후로 매일 하교 버스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다. 내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고 반응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하교 시간이 더 기다려지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홀린 듯이 나를 쳐다볼 때 만큼은 나도 좀 부끄러워진다.

 

무용 없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모르는 나를, 웃게 해주고 좋아해주는 아이.

 

그 아이에게 자꾸만 관심이 간다.


안 그래도 똘망똘망한 눈이 사슴 눈망울처럼 땡그래진 우정이 물었다.

"뭐...뭐라구?"

 

아차! 5초나 지난 뒤에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대답했다.

 

"아, 그 그게 눈꽃이...!"

 

-띠리리리~ 띠리리리~

 

때마침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정의 핸드폰으로 재희의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해보니 재희가 등유를 구하러 내려간 지 2시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한참 통화를 하던 우정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숨을 고른 우정이 말했다.

 

"재희 별장까지 못 올라온대. 내려가 있던 사이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별장 위치까지 올라오기는 곤란한가 봐, 난방 없는 곳에서 잘 수는 없으니 우리가 중턱까지는 걸어서 내려와야 할 것 같다는데..."

 

왜인지 우정이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자세히 보니 안색도 좋지 않다.

 

"우정아 너 어디 아파?"

 

급히 이마에 손을 대보니 어제 우정이에게 주려고 테스트해봤던 핫팩보다 뜨겁게 느껴진다.

 

"병이 또 도졌나봐... 의사 쌤이 나 아픈 거 정신적인 불안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셨거든... 그리고 사실 아까부터... 으슬으슬하기는 했어...히히"

 

그 힘없는 웃음에 나는 대꾸하는 것도 잊고 급히 방에 들어와 어제 준비해뒀던 핫팩을 모두 꺼냈다. 봉투를 개봉하여 흔들어준 후 우정의 외투 곳곳에 넣어두고, 우정이가 입을 수 있게 도와줬다.

 

30분 정도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한 대비를 시작했다. 역시나 차도는 없었고, 아픈 우정이와 함께 이곳에서 하루를 지새울 수도 없었다. 지금의 우정은 간신히 걸을 수는 있다. 중학생들이 차를 운전해서 왔다는 사실을 들킬 수 없었기에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재희에게 연락해보니 길을 따라 오면 차를 대기시켜 놓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려오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되는 것 같으면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전장에 나서는 용병들처럼, 두꺼운 외투를 입은 후, 채비를 단단히 하여 별장 문을 열어 나섰다.

 

터벅...터벅...

 

그렇게 함께 눈길을 헤치며 별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걸었던 찰나

 

"영수야...손."

미약한 목소리와 함께 우정이 한쪽 손을 잡아 왔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이 솜털같이 가벼웠다. 내 손을 잡은 것은 그녀였건만, 어째선지 자꾸만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 불안한 걸음을 내딛던 우정이가 바람 빠진 인형 마냥 픽하고 쓰러져 버렸다.

아픈 몸의 우정이에게는 너무 고된 시간이었나 보다. 눈치 없는 바람은 거세게만 불어 왔다.

나에게는 처음부터 우정이를 업고 간다는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정이를 업었다. 그녀가 생각보다 가볍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겁게만 다가왔다.

내 마음 속의 그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길 바랐다.

 

 

한 발짝 내딛는다.

이전에 나를 이끌던 그녀의 발자국은 없다.

내 발자국에 그녀의 발자국이 함께 담겨있다.

 

 

두 발짝 내딛는다.

그녀에 대한 마음만큼 발자국은 깊고, 어둡게 찍혀갔으나

뒷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숨결은 찬 공기에 얽혀

나에게 채 닿기도 전에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세 발짝 내딛는다.

그녀를 증명하는 것은 등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저 그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실었다.

내가 멈추면 그녀도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대로 내 세상이 멈추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네 발짝 내딛는다.

거세만 지는 눈발에, 너의 숨결은 희미해져만 갔다

그런데도, 이 눈이 그치면 더 이상 흘릴 너조차 없어질 것 같았기에

여전히 눈길을 헤쳐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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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세상은 놀랍도록 무채색이었고, 칠흑의 하늘은 폭설마저 삼켜버릴 듯 했다.

 

검은 눈길을 헤쳐나가며,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내게 업혀있는 유일한 색채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 작지만 치열한 세상 안에서 우리는 체온을 맞대고

 

서로의 차가움에 기대 조금씩 잠겨갔다.

 

그렇게 나아갔다.

 

그렇게 세상에는 발자국과 너와 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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